전시실2F

오대산 상원사 범종

오대산 상원사 범종은 성덕대왕 신종(에밀레 종) 보다도 45년이나 먼저 만들어진 한국 유기명 범종(有記銘梵鍾)가운데 가장 오랜 금속문 기록을 지닌 한국 범종의 조형(祖型)입니다. 처음에 어떤 목적으로 주조(鑄造)되어 어느 절에 보관되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안동의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안동 읍성의 누문(樓門)에 걸려 있던 것을 1469년(조선조 예종1) 국명에 의하여 죽령을 넘겨 현 상원사 위치로 옮겼다고 합니다. 현재는 종구(鍾口) 일부에 작은 균열이 생겨 타종하지 못하고 모작품(模作品)을 만들어 상원사 종각에 안치하였습니다. 이제 상원사 범종의 원음은 애석하게도 들을 수 없지만 신라역사과학관에서는 그동안 관람료를 지불하시고 입장하신 후원가족 여러분의 정성에 힘입어 여기에 실물크기의 복원 제작을 성공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타종 후 1초 이내에 사라지는 타음(打音)과 10초 전후까지 이어지는 진동(몸체 떨림)에 이어 3분까지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는 은은한 맥놀이(beat)현상을 되 살릴 수 있어서 감사할 뿐입니다. 

범종 부분 명칭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은 1966년 불굴사 석가탑 2층 탑신에서 발견되었다.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석가탑을 세울 때 탑속에 넣은 것이다. 
인쇄시기는 750년 경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 보다 20여년 앞선 것이다.<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은 경문 전부를 완전하게 새겨 글자면을 위쪽으로 하여 먹칠을 한 다음, 한지(신라종이)를 놓고 말총과 같은 인체로 문질러서 찍어내어 두루마리 형식으로 장정한 책(목판권자본)이다. 경의 내용은 죄를 멸하고 목숨을 연장하는 법을 구하기 위하여 옛탑을 수리하거나 소탑을 77기, 또는 99기 만들어 탑에 봉안하고 다라니(神呪)를 염송하면 그 주력공능(呪力功能)에 의하여 수복과 성불을 얻을 수 있다는 밀교적 법식이다.  신라에서는 낭산 황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 명문(706년)으로 보아 이 경이 처음으로 봉안되었을 것으로 짐작하나, 사리함이 발견될 당시 경은 산화 부식되었는지 없었다. 그러나 8세기 중엽(751년) 조성된 석가탑에서 발견된 이후, 여러 다른 탑에서 봉안되었을 것으로 보아 조탑경(造塔經)으로  정착된 것을 알 수 있다. 

직지심체요절

고려말 청주 흥덕사에서 찍어낸 <직지심체요절>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로 찍은 책으로서, 1972년 UNESCO에서 공인을 받은 것이다. 이책의 마지막 장에는 인쇄시기(1377), 인쇄장소(청주목 흥덕사), 인쇄방법(활자인쇄)이 기록되어 있다. 독일의 구텐베르크 활자보다도 70여년이나 빠르다. 우리 선조들이 인류 문화사상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것이 세계인에게 인정 되었다. 중국은 15세기 말경인 명나라 때부터 동활자를 만들기 시작했고, 일본은 16세기 말 우리 나라에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배워갔다.

해인사장경판(팔만대장경 중 반야심경)

해인사 경판 중 불교의 핵심 진리를 가장 깊이 뚫어 담았다는 반야바라밀다심경은 우리 나라 경판 중 가장 많이 인출되어 마모가 심해졌다. 따라서 현재는 인출이 불가능할뿐더러 글자의 변형이 심하여 손잡이 부분도 철태로 보강하여 보관되고 있다. 일본(日本) 에서는 고려 말기부터 조선건국과 세조4년(1459)까지 해인사 경판을 30여회 걸쳐 인출해 줄 것을 요청해 왔고, 많은 장경들이 건너갔다.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인출 본을 입수, 그 필체를 참작하여 본 경판을 제작 복원하였다.

해인사장경판(팔만대장경 중 반야심경)
고려시대에는 주로 사찰에서 많은 불경을 찍었다. 1007년에 개성 총 지사 에서는 『보협인다라니경』을 찍어냈다. 고려시대의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다. 고려에서는 부처님의 힘으로 외침을 막고자 대장경을 새겼다. 1087년 초조대장경, 1101년에는 의천이 속장경을 새겼다. 이 경판은 13세기 몽고란 때 불타 버렸다. 현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재조대장경은 1236년부터 16년 동안에 걸쳐서 다시 새긴 것이다. 경판이 무려 팔만개나 되어 '팔만대장경' 또는 '고려대장경'이라고 한다. 오랜기간 원래의 모양이 잘 보존되고 글씨와 새김이 한사람 솜씨 같다. 이는 우리 민족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문화재이다. 

신라 교관선(무역선)

서기 828년(통일신라시대)에 청해진 대사(淸海鎭 大使) 장보고 장군(張保皐 將軍)은 전라남도(全羅南道)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우리나라의 황해(黃海)와 남해(南海)에 창궐하던 해적들을 물리치고 신라(新羅) 당(唐) 일본(日本)을 잇는 삼국의 무역을 주도하였다. 청해진을 주축으로 하는 동북아를 중심으로 남방과 페르시아 아라비아 등 서방 세계와의 중계무역을 통한 교역을 활발히 하였는데 그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던 배가 교관선이다. 교관선은, 청해진(바다를 지키는 신라 수군의 기지)을 주진(主鎭)으로 하고 당나라 산둥반도의 적산포(赤山浦)와 일본의 박다진(博多津=하까다)을 무역 근거지로 하여 황해와 동중국해 현해탄(玄海灘)과 일본열도 내해에 이르는 해역에 걸쳐 무역활동을 하였던 선박이다. 교관선은 우리나라의 전통선박인 평저선식 연안선(平底船式沿岸船)을 그 기본으로 하고 황해(黃海) 동중국해(東中國海)와 현해탄(玄海灘)을 항해(航海)하는데 필요한 항해 장비(航海裝備)와 의장 장비(艤裝裝備)를 더 추가하고 보강하여 명실공히 연안(沿岸)과 대양(大洋)항해에 있어서 왕자의 자리를 차지하였던 무역선이다.

신라 토기와 기와

월인천강지곡

한글 창제 반포 후 1년(1447) 한글 활자를 갑인 소자와 병행, 인출한 것으로 동시 간행 된 석보상절은 한자 밑에 한글소자로 하고 있으나 유독 월인천강지곡은 한글을 크게 부각 시켰다는 것은 민족의 주체성과 자긍심을 심어주고 있다. 혹자들은 한글자는 목활자 운운 하고 있으나, 검증결과 주물사 주조법에 의해 동활자로 찍은 것이 확인되었다.  
한글 창제와 동시에 금속활자라는 것은 우리민족의 문화유산 중 백미로 91년 U.N가입시 대표기념물로 선정되어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독일 구텐베르그 활자보다 빠르다.

일성정시의

세종 19년(1437)에 세종의 명(命)에 의해 완성된 주야측시기(晝夜側時器)로 태양시(太陽時) 와 항성시(恒星時)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용으로 된 기둥에 적도에 평행한 원반을 지닌 자루가 물려 있으며 이 자루 속의 구멍을 북극성에 맞추어 시간을 알아내는 주야 겸용 시계다. 원반 위에는 주천도분환, 성구백각환, 일구백각환이 각각있어 돌게 되어 있으며 이들 환에는 백각눈금이 새겨져 있다. 백각법에 따라 만들어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당시 모두 4벌이 제작되어 국중에 하나를 설치하고, 하나는 서운관에, 나머지 둘은 평안과 함경의 양계 원수영에 하사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여기에 전시된 일성정시의는 높이 약 1m, 환의 지름 41.4cm, 청동으로 된 것으로 건국대학교 남문현 교수의 연구설계도면을 견본으로 하여 한국과학사물 연구소가 제작하였다. 

앙부일구(해시계)

조선시대에 사용하였던 대표적인 해시계이다.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명을 가진 민족이라면 시간을 측정하는 수단으로서 해시계를 만들어서 사용하였다.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문헌이나 유물을 보면 여러가지로 그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형태도 다양하다. 그러나 해시계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보는 방법 즉 사용할 줄 알아야 했고, 가질만한 신분이어야 했다. 따라서 해시계는 귀한 물건으로서 취급되었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의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가지 생각끝에 백성들을 위해 해시계를 만들게 되었다. 서기 1434년인 세종 16년 10월 초 2일의 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모든 시설에 시각보다 큰 것이 없는데, 밤에는 물시계가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로 만들었으니 그 모양이 가마솥 같고....
(서울 장안의 혜정교와 종묘 앞) 길가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백성들이 만들 줄을 알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앙부일구라는 해시계가 제작된 것이다. 그 후, 세종 19년에는 다른 종류의 해시계도 만들었지만, 이 앙부일구만큼 백성들의 사랑을 받고 널리 애용되지는 못했다. 앙부일구는 궁궐안의 곳곳은 말할 필요도 없고, 거리에도, 13도에 있는 관가에, 그리고 지방 군영에 널리 설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도 돌, 나무, 자기, 심지어는 상아로 만들어서 집에서나 여행중에 가지고 다니면서 널이 사용하게 되었다. 여기에 전시된 앙부일구는 보물 제845호로 지정받아 현재 서울에 있는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선명문화재 연구소가 복원 제작한 것이다. 이 앙부일구의 지름은 35.4cm이며, 구리를 부어서 만들고 검게 표면 처리하였다. 둥근 그릇은 4개의 기둥으로 받처져 있고, 이 기둥들은 십자로 된 받침대 위에 박혀 있느데, 이 십자로 되어 있는 받침대에는 홈이 패여 있다. 이 홈은 그 속에 물을 담게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앙부일구의 수평을 맞추기 위해서이다. 반구의 모양을 한 그릇의 안쪽에 해의 그림자를 만드는 영침이 하늘의 북극을 향해 꽃혀 있고, 그림자의 위치로 일년의 절기와 하루의 시각을 잴 수 있는 흰 눈금이 그어져 있어서 계절은 1내지 2일 정도로, 시각은 1분 정도로 정확하게 측정된다. 앙부일구의 둘레에는 24방위와 24절기가 적혀 있고, 한양에서의 북극의 높이가 37도 20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앙부일구에 새겨져 있는 글씨는 모두 은으로 상감한 것이다. 

세종대왕 규표

태양이 정오에 가장 높게 떠 있을 때, 수직하게 세운 막대가 만드는 그림자의 길이를 재는 관측 기기를 규표(圭表)라고 하는데, 땅위에 높여 놓은 자 막대인 규(圭)와 그림자를 만드는 수직하게 세운 막대인 표(表)를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규표는 인간이 만든 천문 기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기기이다. 
조선의 4대 국왕인 세종대왕(1397-1450)은 그의 재위 19년에 규표를 구리와 돌로 만들게 하고, 그해 4월 15일에 경북궁 경회루 북쪽에 있는 대간의 대(큰 천문대라는 뜻) 옆에 설치 하였다. 이때 세종의 천문학자들이 만든 규의 길이는 126척(26m 8cm)였고, 표의 높이는 40척(8m 28cm)이었다. 그러나, 이 규표도 그후 거듭된 외국의 침략군에 의해 파괴되고, 급기야 일제 36년간의 통치기간에 그 흔적 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여기에 전시된 규표는 세종대왕의 규표를 1/10로 축소하여 복원한 것으로써 규의 자재는 흑요석, 받침대의 자재는 화강석, 표의 자재는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한 구리, 들보(횡량)의 자재는 구리, 추는 3개이며 자재는 구리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석각

조선 태조4년(1395년)에 제작한 돌에 새긴 고대 천문도. 이 천문도를 만들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이성계가 조선 왕국을 창건 하였지만 고려의 충신들의 완강한 반발로 고심하던 초기에 평양성에 사는 사람으로부터 집안에서 귀중한 보물로 전해 오던 옛 고구려의 석각 천문도의 탁본을 기증 받았다. 이성계를 비롯하여 그의 신하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예전에는 하늘을 관장하는 일은 왕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성계에게 왕권을 상징하는 귀중한 보물이 생긴 것이다. 이성계는 이 탁본을 따라 새로운 천문도를 돌에 새기도록 권근에게 즉각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권근을 총감독으로 하는 12명의 작업반이 구성되었다. 그 중 유방택은 별들의 위치를 계산하고, 설경수는 글자를 새기는 일을 관장하였다. 그때 사용한 돌은 흑요석이며, 높이 211cm, 너비 123cm, 두께 12cm로 당시로는 구하기 어려운 단단한 검은 돌이다. 이 돌에는 양면에 천문도가 새겨져 있는데, 천문도 이름의 위치가 서로 다르며 또한 아래 위가 서로 반대이다. 따라서, 어느 면을 바로 세워서 사용했는지 단정하기 어렵게 되어 있어서 학자들의 연구거리가 되고 있다. 둥근 원으로 된 천문도는 돌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전부 290개의 별자리에 1,469개나 되는 별이 그 속에 새겨져 있다. 천문도의 둘레는 360도가 아니라 365도 1/4로 도수를 표시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일녕의 날수인 365일 1/4로 원주를 표시하였기 때문이다. 하늘의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서 12방위인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를 표시하고, 그 양 옆에 12열차와 12분야를 함께 새겨놓았다. 원의 중심은 하늘의 북극인데, 이 북극을 중심으로 작은 원으로 한양에서 일년 중 언제나 볼 수 있는 하늘을 그렸다. 이 원과 12 방위를 표시하는 큰 원 사이에는 두 개의 원이 그려져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하늘의 적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늘의 황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북극을 중심으로 밖으로 28개의 직선이 그어져 있는데 이 선들은 28수의 경계를 표시한 것이다. 선과 선 사이의 간격이 같지 않는 것은 28수의 크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 천문도를 만들게 된 내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천문도 제작에 참여한 12명의 서운관 관원의 이름과 직위가 차례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이 석각 천문도는 국보 제 228호로 지정되어 덕수궁 궁중유물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으나, 오랜 세월로 풍상에 훼손되어 자세한 모습은 애석하게도 알아 볼 수가 없다. 여기에 전시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태조 4년인 1935년으로부터 600년이 되는 1995년에 그 600주년을 기념하여 복원한 것이다. 돌은 충남 보령군에서 채굴한 오석으로서 높이 220cm, 너비 123cm, 두께 20cm 이다. 두면에 새겨 있는 천문도는 관람하는 사람들이 보기 쉽도록 둘다 바로 세웠다.

천문유초, 성경

천문유초(天文類抄)
조선 초기의 천문학서. 2권 1책으로 목판본이다. 세종 때 이순지(李純之)가 지어 간행한 것으로 상•하권으로 되어 있다. 상권은 53장으로 되어있는데, 《보천가 步天歌》 나 《성경 星鏡》과 비슷한 형식으로 별자리(星宿)를 이십팔수(二十八宿)의 순서에 따라 하나씩 제시하고, 그다음에 그 수(宿) 의 별들을 설명하고 있다. 하권은 24장으로 되어 있는데, 천체•천문•기상현상을 국가의 안위와 만생의 재변과 연관시키는 점성술을 기술하고 있다. 현재, 여기 있는 천문유초는 필사본 2권 1책이다. 

성경(星鏡)
1861년(철종12)에 남병길(南秉吉 1820∼1869)이 편저한 천문서 2권 2책. 상•하권으로 고활자본이다. 《신법보천가 新法步天歌》 에 실려 있는 각 별의 위치를 적어놓은 것으로, 편저자의 긴 서문이 들어있다. 이어서 자미원(紫微垣)•태미원(太微垣)•천시원(天市垣)의 3원과 각항저방(角亢?房)등 28수(宿)의 별 등에 관한 성도(星圖)와 신법보천가 그리고 각 별의 적경과 적위 (至微度) 가 들어 있는데, 3원 28수의 별의 수는 모두 277좌(座)에 1,369별이다. 현재, 여기에 있는 성경은 2권2책중 인쇄본 下권이다.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한국의 문양

청동거울 속 무늬

망건통, 실패 속 무늬

떡살, 다식판 속 무늬

쌍학 흉배 속 무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