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실B1

석굴암 1/5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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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의 개요
창건 연대는 8세기 중엽인 경덕왕10년(A.D751)에 당시신라의 시중(재상)이던 김대성에 의해 창건이 되어진다. 이러한 석굴암의 창건배경은 여러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으나 삼국유사(일연)의 기록을 보게 되면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창건을 하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는 기록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석굴암이 근세에 들어 처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된 것은 1907년 일본인 우체부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세계적 문화유산인 석굴암의 수난이 시작이 되기 시작한다.당시 석굴암이 많이 회손되어 있던 관계로 19013년부터 1962년에 이르는 오랜 시간동안 석굴암의 중수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석굴암이 지금의 많은 문제점들을 가져 오게 된다.

문제점 1) 1913년경의 일본인들에 의한 수리공사 당시 수리공사를 하던 일본인들은 석굴암을 이루고 있던 석재들을 완전해체를 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오류들을 남기게 된다. 이중 가장 큰 오류로 여겨지는 여겨지는 것이 돔외부를 보강하고 있는 콘크리트에 있다. 이로써 궁륭 내부의 고온다습한 공기의 흐름을 차단하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지금의 이슬맺힘 현상(결로현상)을 유발시켰다.

문제점 2) 1917년,1924년경의 수리공사 이같은 결로현상으로 인해 내부벽면에 많은 청태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를 제거할 목적으로 증기세척을 가하게 된다. 이는 내부 석재의 수명에 치명타를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점 3) 1962년경의 우리나라 문화재관리국에 의한 수리공사 문화재관리국은 먼저 석굴암 전실에 목조로 된 가옥을 만들게 된다. 또한 1913년에 설치한 콘크리트 돔위에 또다시 콘크리트 돔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1966년경에는 내부 결로현상을 막기위해 기계장치들을 설치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당치로 인해 내부의 습기란 문제는 다소간 해결을 하였으나 많은 기계장치의 소음과 진동으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1970년대 중반경에는 결국 석굴암의 과학적 보존을 위해 전실 앞부분에 유리로 차단막을 설치함으로서 일반 관람객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석굴암 감로수 모형

석굴암의 감로수 (甘露水)
석굴암으로 향한 종착지에 닿으면 생명수처럼 맑고 깨끗한 샘 하나가 우리를 반긴다. 우리는 이름하여 감로수라 부른다. 1913년도에 일본인들은 석굴암을 해체하고 다시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 그 때에 굴의 후실 중심부에 자리잡은 11면관음보살 바로 뒷편의 암반으로 부터 용출하는 샘을 두 곳에서 발견했다. 이 샘이 경덕왕대의 김대성이 석굴암을 창건 할 때부터 있어 왔다면 이들은 물이 용출하는 이 암반수 위에 석굴을 세우고도 석굴 동서로 돌아나가는 배수구를 만들지 않은 이유는 물이 용출하는 5척(尺) 지하에 배수구를 만들지 않았다면 필연적으로 물은 굴원 밑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물은 암반을 타고 흘러 현재의 감로수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당시 신라인의 지혜를 엿볼수 있는 것이다. 즉 이 곳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은 여름철이 되면 항상 동해의 해풍의 영향을 받게 된다.  여름철 동해의 고온 다습한 공기가 석굴 내부로 들어오게 되므로 내부의 차가운 벽면과 만나게 되면 물방울을 맺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내부의 많은 조상들은 심한 풍화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당시 신라인들은 이 곳 석굴암 바닥으로 항상 영상 9도에서 13도가 되는 차가운 샘물이 흐르게 하였다. 그렇게 되면 내부로 들어온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더 차가운 바닥에 습기를 빼앗겨 버리고 내부 벽면은 항상 건조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장치로서 당시 신라인들은 약 1200년 동안을 습기로부터 무사히 석굴암을 보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석굴암의 수리적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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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다 도면 및 석굴암 수리적 원리
당시 총독부박물관의 측량기사(일보대학 건축과 졸)로 일하면서 불국사와 석굴암의 건축에 사용된 신라인의 수치가 당나라 척이라고 처음으로 밝혔다. 그의 저서 "조선 상대 건축의 연구" 에서 석굴암은 정3각형, 4각형, 6각형, 8각형 등의 기하학적 수리원리가 불교와 예술에 응용 융합된 고도의 치밀한 조형건축 이라고 지적하였다.
후실 궁륭천정은 당시 신라의 천문도가 응용된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고 추측하였다. 후실 입구는 당 12척으로(본존 대좌의 지름도 12척) 석굴암 구조의 기본 모둘(Module)이며, 이는 하루 12시를 나타내며 원의 둘레 360도는 태음력의 1년을, 원의 지름 24척은 하루의 시간을 나타내는 우주공간의 축소 구조라고 밝혔다. 특히 종교적으로 석굴암은 조형건축은 아름다운 비례의 극치가 내재하는 법계정토라 보았다. 원의 중심과 전실 중심으로 이어지는 직선 방향(동남 30도)은 동짓날 해뜨는 방향과 일치한다 하였다.

석굴암 내부 제자상

석굴암 첨차석 모형

석굴암의 도상학 모형

석굴암 관련 서적 및 자료

경주 남산의 감실좌불

보물-198호
좌상 높이-130㎝
감실 깊이-90㎝
암석 높이-230㎝
암석폭-350㎝
석굴암의 원초적 형태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이 작은 석굴의 작은 불상은 현재 남아 있는 우리나라 석불 중에서 최초의 감실 좌상이며, 최초의 선정인상(禪定印像)이다. 선정인 수인이기 때문에 석가여래로 볼 수 있는 이 좌상은 6세기 후반-7세기 초반에 처음 나타나는 경주 남산의 석불중 첫째 시기의 조각품이다. 중국의 북위(北魏) 불상의 영향을 받은 이러한 선정인상은 고구려와 백제에는 6세기경에 각각 금동불이나 납석으로 제작된 것이 남아 있다.
마치 어머니의 품같이 따뜻하고 포근한 감실속에 순진무구한 동심(童心)의 세계를 상징하듯 큰 눈망울에 잔잔한 미소까지 머금고 있다. 실로 보는 이에게 다양한 정감과 감탄을 자아내는 이 불상을 일컬어 어떤이는 “마음씨 좋은 하숙집 아주머니” 같다고 하고, “이 분은 신라의 여왕 곧 선덕여왕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라고도 한다. 요즈음은 고즈넉한 달밤에 촛불을 들고 촛불을 비춰봐야 향기나는 선덕여왕의 아름다운 미소를 느낄수 있다고 하니 경주 남산의 불상중 가장 사랑받는 석불로 변한 것이다.

경주 남산 삼화령 미륵삼존석굴

연도 길이-8척
본존 미륵불-160㎝
연도폭-4척
좌협시보살-100㎝
현실 길이-7척×4
우협시보살-90.5㎝
경주 남산의 장창곡에는 석굴암보다 약 100여년 앞선 시기에 고분을 연상시키는 인조 석굴이 있었다. 언제,왜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이 곳을 찾으면 석굴의 흔적을 알리는 돌 몇 개가 지상에 남아 있을뿐 석굴은 완벽하게 자취를 감춰 애석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1940년(일정기)에 간행된 『경주남산의 불적』의 사진을 보면 천정 개석들은 없지만 인공적으로 측벽을 쌓았던 석재가 많이 보인다.

연도의 기둥돌로 추측되는 석재 뒤편 현실속에는 의자에 앉은 미륵불(椅像)의 모습이 원형을 유지한채 남아 있어 충격을 준다. 책의 설명에 의하면 속칭 애기보살이라 불리는 작은 동자(童子)보살 2구는 산 아래 나무꾼 소년들이 몰래 마을로 옮겼다고 한다. 후일(1925년 4월)에 수습하여 본존상과 함께 경주박물관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의 불상들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생의사(生義寺)의 돌미륵으로 추정하여 흔히 삼화령 미륵 삼존불이라고 부른다.(선덕여왕 13년, 644년) 만약 삼화령 미륵불이 확실하다면 약 100여년이 지난 경덕왕 때 찬기파랑가와 안민가를 지은 충담(忠談) 스님이 3월3일과 9월9일에 차를 공양했다는 그 곳이 바로 이 은밀하고 비밀스런 공간이 된다. 따라서 미륵하생(彌勒下生)의 상대적 주인공이 누구(轉輪聖王)였는지도 그는 분명 알고 있었으리라.

팔공산 군위 삼존불 석굴

국보-109호
본존높이-218㎝
관음보살높이-192㎝
세지보살 높이-180㎝
석굴높이-425㎝
우리나라 대부분의 석굴사원이 암벽에 마애불을 새기고 그 위에 목조 전실(前室)을 세운 소규모 석굴사원을 모방한 형식이다. 팔공산 군위 삼존석굴은 이미 생긴 자연동굴의 암벽을 더 뚫어 그 속에 불상을 안치한 본격적인 석굴사원이라는 점에서 인도나 중국의 석굴과 친근성이 있는 석굴이다. 다만 인도나 중국의 석굴에서는 뚫은 암산 자체의 돌에 불상을 조각하였으나 이 석굴에서는 지상에서 조각한 화강암을 20m 높이의 안산암 계통의 굴속으로 옮겼다는 점 등이 상이한 과정을 거치고 있지만 암산 단애(斷崖)에 석굴을 형성하였다는 점은 가장 원류에 충실한 최초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석불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수인을 갖춘 본존여래가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좌우에는 각각 중국 초당(初唐)의 양식적 영향을 받은 듯한 관음(觀音)과 세지(勢至)보살이 있어 아미타 삼존불(阿彌陀 三尊佛)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진홍섭 교수의 『석불』참고) 과연 항마촉지인 불상도 아미타여래로 볼 수 있을까? 신라 사람들이 우매해서 실수를 하였을까? 경전(經典)에 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하는 혼란스런 의문이 일어난다. 더욱이 1998년에 본격적인 학술 조사를 한 강우방교수는 본존불의 수인은 완전한 항마촉지인이 아니며, 원래는 채색되었으리란 확증을 필름에 담을 수가 있었다는 등의 견해를 나타내어 비상한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 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참고』삼국말 내지 통일 초기에 만들어진 이 불상을 50여년이 훨씬 지나 저 토함산에 나타난 석굴암 본존불의 상호와 관련시키는 학계의 논쟁은 아직도 분분하다. (황수영교수의 『석굴암과 아미타불』)
그런데 왜 이 팔공산 뒷자락에 누구에 의해 석굴 불사가 있어야만 했는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신동아』「우리문화 바로보기 제13회 p611」에 실린 최완수 선생의 글로 대신한다. 
팔공산 군위 삼존 석굴이 생긴 까닭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그 영토를 차지하고 나서는 팔공산을 중악(中岳), 계룡산을 서악(西岳), 지리산을 남악(南岳), 토함산을 동악(東岳), 태백산을 북악(北岳)으로 설정하게 되니 통일 후 가장 먼저 중악의 위치를 확정하여 이를 성지화(聖地化)할 필요성이 절실했을 듯하다. 그래서 중악 기슭인 이곳에 자연 석굴이 있고 그 석굴 안에서 중악의 상봉을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아미타삼존상을 조성해 모시려는 생각을 해내지 않았나 한다. 더구나 이곳은 경주에서 백제나 고구려의 옛땅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길목이었다. 경주-영천-신령-부계-선산-상주로 해서 백제로 가거나, 신령-부계-함창-문경으로 새재를 넘든지 신령-부계-군위-비안-예천-풍기로 해서 죽령을 넘는 길이 모두 이곳을 거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동원된 장병들이 모두 이곳을 거쳐갔을 터인데, 전쟁터에서 죽고 다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허다했을 것이다. 이에 이들이 서방정토인 극락세계로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불사가 거국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절실했을 터이니, 문무왕이 그 8년(668) 11월5일에 고구려 정벌을 끝마치고 서라벌로 회군해 돌아오면서 이곳에 아미타삼존상을 조성해 모시도록 명령한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런 생각을 하도록 한 것은 원효(元曉, 617-686년)대사였을 듯하다. 앞서 밝힌대로 원효는 이 <아미타삼존상> 조성의 교리적 배경이 되고 있는 ‘불설관무량수경’에 대한 연구가 깊어 ‘불설관무량수경종요’ 1권을 지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이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인( 慈仁)현이었고, 요석공주에게 장가들어 문무왕에게는 매제에 해당하는 인척 관계가 되었으니 말이다.
(『신동아』「우리문화 바로보기」의 최완수 선생의 글)

단석산 신선사 석굴(斷石山 神仙寺 石窟)

단석산이란 이름은 국선(國仙)으로 추도된 김유신이 수도하던 중에 칼로 암벽을 쪼겠다는 전설에서 나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민간에 전해 오기를 김유신이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신검(伸劍)을 얻어 석굴 속에 들어가서 검술을 닦으며 큰 돌로 시험했는데 아직도 그 때의 잔돌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 과연 그 때의 석굴(삼국유사의 중악석굴)로 비정(比定)할 수 있을까? 의문은 남는다. 그러나 첩첩산중 깊은 계곡의 팍팍한 등산로를 따라 이 곳 단애의 단석바위(약 10m) 3면에 서면 그 옛날 김유신과 화랑들이 금방 살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 그럴까? 우견편단의 작은 여래 4구와 뾰족 모자, 향로, 버들가지 같은 지물을 가진 신라옷차림의 작은 공양인 2구의 경건한 모습 때문일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일까? 한발 더 그들의 뒤를 따라가 보면 왼쪽 무릅위에 오른발을 살짝 얹고 오른쪽 턱밑으로 손을 고인 듯 한 반가사유상이 우리를 마침내 미륵(약 7m)대불 삼존불로 인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석굴이 국선 김유신의 수도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마멸이 심해 잘 판독할 수는 없지만 조상기(造像記)의 부분적이 명문 해독으로 이곳의 절 이름이 신선사이고, 미륵삼존불임이 밝혀졌습니다. 신선사의 신선은 곧 미륵선화(彌勒仙化)를 가리키며, 이 미륵선화는 화랑의 화신이므로 이 석굴은 국선 김유신과 그의 낭도들이 찾아와 미륵불을 신봉하던 호국 사찰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단석산 신선사 석굴에 관한 이설(異說)은 그 60리 동편에 마주하고 있는 토함산(745m) 석굴암처럼 학계의 논쟁이 분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