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실 1F

신라시대 4급보상식 물시계

물시계의 원리
4급보상식 부전누란 4단 위에 각각 놓여진 4개의 흐르는 물통(漏壺)에서 부표(浮漂)에 꽂힌 잣대(浮箭)로 수위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얼마나 변화하는가를 잣대의 백각(百刻) 눈금을 통하여 알게하는 장치이다. 이 때 전호(箭壺=水海)의 수위가 올라가는 양 만큼 누호의 수위는 내려간다. 누호의 수위가 점점 더 내려가면 수압은 점점 더 약해진다. 따라서 출수량도 감소하고 전호의 수위도 그 양에 비례하여 늦게 올라가 시간은 늦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기계장치를 할 수 없었던 신라시대에는 사람이 직접 되박을 이용하여 물을 누호에 공급할 수 밖에 없었다.  
<물시계의 제작>
국립충북대학교 천문우주학과 정장해교수는 중국 당나라 여재(呂材)의 4급보상식 부전누(627∼649)를 연구(위에서부터 夜天池→ 日天池→平壺→萬分壺→水海)의 근거로하여 신라의 물시계 설계도를 만들고 동과의 이용삼교수는 하루를 12등분한 십이간지(十二干支) 의 시진(時辰)과 이를 100등분한 백각눈금표, 그리고 4계절 24절기에 따라 밤의 길이가 변화하는 오경(五更) 25점(点)의 눈금과 위치를 설정한 도표를 주었다. 이에 신라역사과학관 연구팀은 작업도면에 따라 4개의 목칠제 물통과 11개의 나무로 만든 잣대에 눈금을 새겨 넣을 수 있었다. 특히 잣대의 밑 부분이 동판으로 만든 거북모양의 부표 중심 등허리에 정확히 꽂혀 있을 뿐만아니라 교환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기능장치를 해 두었다. 그래야만 전호로 입수되는 수량(水量)에 비례하여 부표는 스스로 떠 오를 수 있다. 떠 오른 눈금의 표기는 부전의 뚜껑 위에 서있는 동자상(童子像)의 양손이 가르키는 횡면을 기준으로  읽을 수 있게 하였다. 

신라왕경도

<신라왕경도의  제작>
약 1200년 전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의 모습을 1/2000로 축소시켜서 그린 그림으로,  1992년부터 약 2년간 자료연구 및 제작한 원본이다.
크기: 가로 6m, 세로 2.5m
제작인원: 주요부문별 전공자5명,기초작업 인원 10여명, 전사및 모형작업5명(연인원 20명)
제작기일: 2년(기초자료조사1년,회도제작1년)

첨성대모형 1/5

<첨성대 요약>
국보(國寶) : 31호
소재(所在) : 경주시 인왕동(慶州市 仁旺洞) 839의 1, 옛날에는 경주부남(慶州府南) 월남리(月南里) 계림 북방(鷄林 北方) 약 150m, 내물왕릉(奈勿王陵) 북동방(北東方) 약 300m 근방, 俗名 비두골 
연대(年代) : 신라(新羅) 제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6)
<첨성대의 기능>
첨성대에 대하여서는 규표(圭表)의 일종이니, 천문사상(天文思想)과 지식을 상징(象徵) 하는 기념비적(記念碑的)건물이니, 불교(佛敎)의 영향을 받은 종교적(宗敎的)인 제단(祭壇) 이니, 도시계획(都市計劃)의 기준점적(基準點的) 축조물(築造物)이니, 실로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 구조로 보아서 또 고대 천문학(古代 天文學)이 오늘과 달랐다는 점으로 보아서 이는 더 소박(素朴)한 천문관측대(天文觀測臺) 였을 것이 틀림없다. 즉 첨성대 외부 지상으로부터 중앙 개구부까지 사다리를 따라 올라가서 내부(內部)로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2단에 걸친 정(井)자형 장대석(長大石)을 의지한 2개의 사다리를 통하여 상부 정자형 두부(上部 井字形 頭部)에 올라간다. 그 다음에 상단의 서반부(西半部)에 걸친 개폐식판(開閉式板)을 딛고서 하부와 차단한 다음에 충분히 넓은 공간에서 국가의 길흉(吉凶)을 점치는 천문관측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첨성대의 그 뛰어난 조형미(造型美)와 그 견고(堅固)한 축조기술은 모든 사람이 찬탄(讚 嘆)하는 바이며 고대 천문대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것의 하나이다. 

천정 천문도

신라 선덕여왕 6년인 서기 637년 밤하늘의 별자리를 재현해 놓은 천정 천문도이다. 조선시대 남병길의 <성경>으로 1319개 별의 위치를 세차 계산하였다.

신라시대 해시계

신라의 역법은 중국 역법의 도입에서 시작되었다. 처음 역서가 쓰이기 시작한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5세기 이후 백제에서 원가력을 시행하였고 6세기 중엽에는 일본의 요청에 의하여 역박사를 보냈으며, 604년부터 일본에서도 원가력을 썼으니까 신라에서도 6세기에는 원가력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 14년(674)에 당나라의 인덕력을 전습하여 개력 하였다고 하니, 이때부터는 인덕력을 썼음이 확인된다. 그 후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선명력으로 개력하여 그것이 고려에 계승되었다. 이렇게 신라의 역법은 중국의 역법을 따랐고, 이에 따라 시각제도도 중국을 따르고 있다. 시간의 측정은 해시계와 물시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국립경주박물관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원반형 해시계 모양의 파편이 있다. 반경 약 33.4cm, 최대 두께 16.8cm의 이 해시계 모양의 원반은 자시에서 묘시까지의 부분이 남아 있는데,  6~7세기경에 제작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해시계로, 다른 하나는 회전시키는 방위판으로 쓰여졌으리라 생각된다.원을 24등분하여 24향의 24자가 새겨진 원반의 중심에서 시표의 막대기를 세울 수 있게 했고, 원반 아래 부분에는 그것을 회전시킨 듯한 흔적이 있어 회전 방위반으로도 쓰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한대 이후 원대 이전의 중극의 전통적 해시계와 그 형식에서 뚜렷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남산유적복원도

천상열차분야지도 목판본

황남대총출토유물

이미지 없음